EVERYTHING EVERYWHERE ALL AT...

2023. 3. 2. 00:41

 이건 옐에게 불공평한 싸움이다.

 여느때처럼 사소한 일로 싸운 뒤 니키가 방에 틀어박힌 지 벌써 나흘 째. 평소라면 잔뜩 씩씩거리며 아침 일찍 집을 나가 저녁 늦게 돌아오기를 며칠 반복하다 어느날 벼락같이 옐의 방(원래는 니키와 옐의 방이다.) 문을 열어젖히고 싸운 이유만큼이나 유치한 화해를 했건만. 이번에는 무슨 바람이 든 건지 방에서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았다. 니키가 밖에 나도는 것보다 불안감이 줄어 옐로써는 만족스러운 일이어야 하지만, 어째선지 방문 틈새로 새어나오는 영화 소음이 더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차라리 평소처럼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몸단장을 하다 밖으로 나가, 옐이 시계와 현관을 몇 번이고 번갈아보며 짜증과 불안을 삭힐 때까지 들어오지 않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배부른 생각까지 들었다. 이따금 영화 속에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커플의 소리가 들려올때는 먼저 방문을 열어젖히고 싶다는 충동까지 들었다. 왜지? 하기사, 원래 폭풍전야가 가장 조용한 법이라니까. 저 인간이 저렇게 조용히 있다가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시끄럽게 굴까봐 걱정하는 거지. 이를테면 헤어지자고 한다거, 아. 생각의 끝이 어딘가에 다다르자 옐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다고 생각이 끊어지는 건 아니지만, 조금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세팅하는 데에 신경을 돌릴 수는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며 옐은 니키가 헤어 에센스를 바르지 않은 지도 나흘이 지났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아마도 조만간 다시 니키가 방 밖으로 나온다면 개털이 된 니키의 머리를 정돈하는 것은 제 몫일 거란 사실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따라 니키가 방 밖으로 나오는 날이 언제일지, 혹은 영영... 같은 불안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었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면서도 그랬다. 어디서 비롯된 감정인지, 생각의 끝이 무엇인지, 이 불안은 어떤 이유에서 온 건지 모르면서도 마냥 분한 감정이 들었다. 자신은 이 작은 소음이 폭풍전야의 적막은 아닐지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도무지 생각해도 제 애인이란 작자는 자신만큼 걱정을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옐을 더욱 분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옐에게 불공평한 싸움이다. 저 인간은 이런 생각도 안 하겠지. 평소처럼 지겨운 영화나 주구장창 틀어보면서 아, 배고프네~ 피자나 시켜 먹을까~ 같은 태평한 소리나 하고 있을...

 

 "나가자!"

 

 "하?"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벌컥 열리고, 옐의 예상보다도 개털이 된 산발 머리 니키가 방 밖에 나왔다. 대충 걸친 잠옷은 토마토 소스와 기름 자국으로 얼룩덜룩했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은 건지 옅은 다크서클이 눈가에 내려앉았다. 산발이 된 머리에선 이따금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제 예상보다 처참한 애인의 모습에 옐은 5초에 한 번씩 새로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 하... 허. 허, 참. 니키는 감탄사의 끝마다 가자!라며 옐을 재촉했다.

 

 "아니, 허, 참... 그보다 어딜 가자는 말입니까? 지금 그...(여기서 옐은 다시 니키를 훑어보곤 잠시 말을 잃었다.) 몰골로."

 

 "가야 할 곳이 있어."

 

 "혼자 다녀오시던가요."

 

 "집으로 가야해."

 

 "그러니까 다녀오... 예?"

 

 "나가자! 집으로 가야해."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w. 비여

 

 

 니키는 어느 날 나타났다. 뉴욕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고층 건물들 사이 빌라촌, 그 네 번째 골목 귀퉁이에서 나타났다. 어느 더운 여름날, 엄마 손을 놓친 미아인지 고아원에서 나온 고아인지, 그도 아니면 학대로부터 도망친 아이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심지어 니키 자신조차도!)채로 니키는 나타났다. 태어났다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니키는 늘 스스로를 나타났다고 말했다. "나는 나타났지. 어느 더운 여름날, 빌라촌 네 번째 골목 귀퉁이에서!" 니키 혼자라면 기억하지 못했을 그 정보를 기억한 것도 어느 늙은이 덕분이었다. 니키는 거리에 사는 가장 어린 아이였다. 적어도 니키가 아는 한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니키는 함께한 모두를 늙은이라 불렀다. 누구도 니키에게 존중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니키는 그들을 존중했다 이해하고 사랑했다. 니키는 많은 사람들과 지냈다. 순간을 공유한 것을 지냈다고 표현하는 게 맞다면 말이다. 하루도 안 지나 떠난 사람도 있었고, 임종 직전까지 니키의 곁을 지킨 사람도 있었다. 뉴욕은 겨울이면 추웠고, 집이 없다는 가정 하에 따뜻한 건 체온뿐이었다. 니키는 유독 따뜻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네 영혼이 따뜻하다는 증거야. 어느 늙은이가 한 말이었다. 영혼이 따뜻해? 그게 무슨 뜻이야? 네가 따뜻한 사람이라는 거지. 그렇겠지? 다들 말하잖아, 나 열이 많다고. 그런 따뜻함이 아니야. 그러면? 너는 좋은 사람이라는 거야. 늙은이의 말대로 니키의 곁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있었다. 순간을 공유하고 체온을 나누었다. 뉴욕은 겨울이면 추웠지만 금새 봄이 왔다. 종종 겨울이 오면 눈을 뜨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게 니키는 아니었다. 니키는 언제나 뉴욕의 봄을 봤다.

 

 "벌써 봄이네!"

 

 "..."

 

 왜 그렇게 뾰루퉁해? 기가 찰만큼 무심한 니키의 말에 옐은 헛웃음을 찼다. 허, 그걸 지금 말이라고 묻는 겁니까?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란 걸 니키도 알기 때문에 대답은 없었다. 대답 대신 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핸드크림(물론 옐의 것이다.)을 바른 두 손은 조금 축축하고 미끄러워서 힘을 주지 않으면 떨어지기 일수였다. 니키는 손을 자주 내미는 편이 아니었지만 가끔 변덕마냥 옐의 손을 재촉했고, 그렇게 한 번 잡은 손은 어지간하면 놓지 않았다. 싸우고나서 말은 커녕 얼굴도 안 본지가 나흘인데, 대뜸 방문을 열고 나와 나가자는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 거나. 결국 그 성화에 못 이겨 단장을 마친 뒤 집을 나서자마자 손을 잡아온다 거나. 그렇게 잡은 니키의 손은 분할 만큼 따뜻하고 또 익숙하게 거칠다거나. 온통 이상한 기분이 들어 옐은 손끝으로 메니큐어가 조금 벗겨진 니키의 손톱을 문질거리다 다시 놓기만을 반복했다. 

 

 "내 손 따뜻하지?"

 

 니키는 옐이 약지 손가락을 건드릴 즈음 고개를 들어 히죽였다.

 

 "뭡니까, 그 표정은? 아주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십니다?"

 

 "웃기시네, 멍멍이 너야말로 지금 꼬리 흔들고 있는 거 안 보여?"

 

 "꼬리가 어딨습니까, 꼬리가."

 

 "예전에는 달고 다녔잖아? 나는 그거 좋았는데. 진짜 개새끼 같아서."

 

 "허."

 

 H-O-M-E, 집. 늙은이가 말하면 니키는 그 말을 따라 했다. H-O-M-E, 집. 이게 무슨 뜻이야? 집은 그러니까, 네가 사는 곳이야. 사는 곳? 그러면 뉴욕이 내 집이야? 뭐, 그렇지. 하지만 조금 달라. 집은, 어, 아무리 겁이 많아도(나는 겁 안 많은데! 시끄러워, 일단 들어봐.) 네가 집에 있으면 너는 무서워할 게 없어. 네가 아무리 화나 있어도 집에 돌아가면 기분이 풀려. 집이란 그런 거야. 그러니까... 네 영혼이 사는 곳. 니키에게 집을 알려준 늙은이는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떠났다. 니키는 다른 늙은이들이 그 시체를 치우는 것을 지켜보며 늙은이의 영혼은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여긴 왜 온 겁니까?"

 

 "말 했잖아? 집으로 간다고."

 

 있으나 마나 한 여러 복잡한 서류 상으로는 이곳, 뉴욕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고층 건물들 사이 빌라촌의 그나마 신식 건물이 니키의 집이 맞았다. 카지노에서 나온 뒤 니키가 가지게 된 것이었다. 니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옐은 니키가 무엇을 바랐는지 알지 못했다. 아파트를 달라고 했나? 아니면 돈? 무엇을 바라 이 건물을 갖게 된 건지, 그리고 또 무엇을 바라 이 건물을 떠나 자신과 함께하게 된 건지 옐은 무엇도 알지 못했다. 궁금한 마음보다 직접 물어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고, 니키의 속사정을 알고 싶은 마음보다 제 것을 보여줬으니 네 것도 보여달라며 니키가 제 속을 헤집는 걸 막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니 옐은 이 건물이 니키에게 오게 된 경위를 전혀 알지 못했다. 니키가 옐과 함께 지낸 이후로 이 건물을 뉴욕 거리의 노숙자 쉼터마냥 쓰고 있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와서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니키는 종종 큰 사고가 생기면 서류와 이것저것의 이유로 들리고는 했지만 옐에게 함께 가자고 한 적도 없었고, 옐이 먼저 오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으며 함께 가자고 한들 거절했을 터였다. 말이 좋아 빌라촌이지 판자촌이나 슬럼가와 다름 없는 골목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고, 그게 아무리 니키와 관련된 거라고 해도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니키가 이곳을 집이라고 불렀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딱히 니키가 자신을 남자친구나 애인, 남편(아직은 아니다.)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함께 사는 곳을 집이라고 강조하거나 어떤 소유와 명칭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란 건 옐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지금까지 니키가 말한 집은 니키와 옐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었고, 니키는 뉴욕 거리를 이전에 살던 곳이라고 명칭했으며, 이따금 영화를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하기도 했다.

 

 "멍멍이 넌 영혼이 있다고 믿어?"

 

 "갑자기 또 뭡니까?"

 

 "나는 잘 모르겠어. 만약에 존재한다면 말야, 그건 나의 것일까?"

 

 그때 니키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고, 옐은 그런 니키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어도 내 것은 될 수 없겠지. 옐은 니키를 소유하고 싶은 게 아닌데도 종종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바보같아지는 걸 보면 이것도 사랑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옐은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여기 페인트칠 새로 해야겠네."

 

 "아, 늙은이! 내가 여기에 꽁초 버리지 말랬지!"

 

 "맞아, 지난 번에 수도 터진 건 어떻게 됐어?"

 

 옐의 손을 잡고 끌고가다시피 건물 안을 쏘다니며, 니키는 저를 반겨주는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안부를 나누었다. 모두들 니키를 오랜 가족마냥 반겼고, 니키 역시 그들을 늙은이라 부르며 스스럼없이 굴었다. 집에서는 혼자 힘으로 피자 시키는 것도 귀찮아 하는 주제에 제법 건물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문제가 생기면 또 전화 해. 전화, 그때 전화기 안 샀어? 아~ 그거 다시 사줄게."

 

 "설마 제 돈으로 사는 건 아니겠죠?"

 

 "그럼 누구 돈으로 사게?"

 

 니키가 옐과 말을 섞으면 누군가는 옐에게도 아는 체를 했다. 니키, 이쪽이? 아~ 맞아. 전에 말했던 걔. 그럴 때면 니키의 얼굴은 조금 붉어지기도 했다. 도대체 뭐라 말을 한 건지, 상대방도 덩달아 어쩔줄 몰라 하기도 했다. 가까이서 말을 섞기도 싫은 사람들일 줄 알았는데, 니키의 지원 덕분인지 그저 니키의 첫인상이 엉망이었던 것 뿐인지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제법 멀쩡한 편이었다. 다려지진 않았지만 깨끗한 옷을 입었고, 향수 냄새가 나진 않았지만 비누 냄새가 났다.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거나 아무 데나 침을 뱉지도 않았으며, 몇몇은 복도에서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고 있기도 했다. 집이 생긴 이들은 더이상 노숙자(露宿者)가 아니었다. 

 

 니키는 가진 게 없었다. 어제를 빌리고 내일을 훔치며 살았다. 내 영혼(만일 존재한다면 말이지,)은 나의 것일까? 오래 배운 늙은이들은 그런 질문을 하는 니키에게 두꺼운 책들을 추천해주고는 했지만, 책은 훔쳐도 별 쓸모가 없었고 보통은 다른 늙은이가 가져가 뗄감으로 썼다. 가까스로 지켜내 펼치더라도 한 문장에 모르는 단어가 절반이 넘어 니키는 책에는 손을 대지 않게 되었다. 대신 니키는 영화를 봤다. 카지노를 나와서는 줄곧 영화만 봤다. 소리 없는 흑백 영화도, 번쩍이는 마법같은 영화도. 카지노에서 준 건물의 1층 가장 끝 방에 스프링이 튀어나온 낡은 소파와 구닥다리 텔레비전 하나만 놓고 그렇게 지냈다. 더 좋은 소파와 텔레비전을 살 수 있었지만, 니키는 그 낡고 헤진 것들이 좋았다. 특히 영화를 좋아하던 어떤 늙은이가 숨쉬듯 말한 구닥다리 텔레비전은 니키의 로망 그 자체였다. 가끔 지직거려도 쿵쿵치면 다시 돌아오기에, 니키는 그 건물을 떠나기 전까지 낡은 소파와 구닥가리 텔레비전이 고작인 그 방에서 지냈다. 

 

 "니키, 네 방 아직도 남겨뒀어. 안 돌아올 거야? 다들 널 그리워 해."

 

 잠든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안고 있던 어떤 늙은이가 니키의 어깨를 쓸었다. 방금까지 생글거리던 니키는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옐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미묘한 흔들림이 있었다. 돌아오고 싶으면 와도 돼. 우린 다 널 환영하니까. 늙은이는 그러고는 둘을 스쳐 지나갔다. 니키는 옐의 눈을 바라보고 고개를 돌렸다. 잔뜩 흔들리던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건지, 들썩이던 입술이 옐의 뇌리에 박혔다. 그러니까 이곳은 집이었다. 그들의, 니키의, 집.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걸 옐은 문득 떠올렸다. 

 

 니키가 가장 처음 본 영화는 리틀 니키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나도 니키인데! 니키가 가장 많이 본 영화는 로맨스 영화였다. 이유는 더욱 단순했다. 로맨스 영화가 많았기 때문이다. 니키는 구닥다리 텔레비전 속 영원한 연인들을 보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애정과 사랑, 정해진 관계의 무게를 따라 하고는 했다. 사랑해. 해가 지면 널 보러 올게. 내가 진짜 뭐에 씌었나보다. 그 어느 것도 니키의 사랑이 아니었고, 니키는 그런 순간마다 그가 보고 싶었다.

 옐이 보고 싶었다.

 지금의 니키는 돈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아파트가 있었고, 낡은 소파와 구닥다리 텔레비전이 있었다. 대문짝만하게 니키의 이름을 써두어도 괜찮은, 오롯한 니키의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니키는 가진 게 없었다. 정작 가지고 싶은 건 가진 게 없었다. 시간이나 영혼, 가족은 돈으로 살 수 없었다. 훔칠 수는 더더욱 없고. 억울해.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훔칠 수도 없어. 나는 가족이 가지고 싶단 말이야. 사랑해. 해가 지면 널 보러 올게. 내가 진짜 뭐에 씌었나보다. 전부 니키의 사랑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니키가 가지고 싶은 것은...

 

 "나는 가족이 가지고 싶어. 이건 어디서 훔치지도 못하는데. 그래서 나는 네가 필요해."

 

 뉴욕 거리를 떠나 한참을 헤매이다 옐을 다시 만난 날, 니키는 울먹이거나 흐느끼진 않았지만 비인지 눈물일지 모를 굵은 방울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는데 빗물이 맺힌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다. 그래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건 니키였다. 나는 네가 필요해. 니키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여기가 아니야. 니키는 중얼거리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탓에 니키의 손톱이 옐의 손등을 파고들자 옐은 짧은 신음과 함께 급하게 손을 뿌리쳤다. 뿌리친 손이 허공에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따라서 옐의 시선도 흔들렸다.

 니키는 언제나 그랬다. 옐의 인생에 나타나 폭풍처럼 온갖 것을 헤집었다. 옐의 삶을 온통 흔들어놓고 떠나지도 않고, 뻔뻔하게 자리잡은 불청객이었다. 그런데 그 불청객이 이제는 없어서는 안돼서. 어떤 이유에서건 옐은 니키가 다시 폭풍처럼 제 인생을 헤집고 떠나버리진 않을까, 하는 자각 없는 불안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니키는.

 

 니키는 옐 역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지는 몰랐다. 하지만 옐 역시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같은 사랑이 아니더라도 상관 없었고, 이건 니키의 사랑이었다. 

 

 손을 놓은 이후로 니키는 다시 옐의 손을 잡지 않았다. 옐도 먼저 니키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니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돌아가자며 옐을 재촉했고, 여러 배웅을 받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옐의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니키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소같으면 뭐가 어쨌고 저쨌고,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주고도 남았을텐데. 니키는 고개를 살짝 들고 허공에 두 눈을 깜빡이기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옐은 그 시간이 조금 허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만일 앞으로의 삶에 니키가 없다면, 앞으로의 옐의 삶은 조금 허전할 거라는 생각도. 

 

 "옛날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옐의 집으로 돌아오고 평소와 같이 옷을 갈아입고 몸을 씻고 평소와 다르게 아무 말이 없던 니키는 소파에 웅크려 앉더니 입을 열었다. 옐은 조금 떨어진 채로 소파에 앉았다. 니키는 옐이 앉자 금새 몸을 붙여 왔다. 구태여 다가오는 니키를 피하지는 않았다. 

 

 "한 말이 한두가지입니까?"

 

 "비 오는 날."

 

 "비 오는 날은 또 하루이틀이고요?"

 

 "정말 기억 안 나?"

 

 정말로? 니키가 고개를 들어 옐의 시선을 좇았다. 우르릉, 옐의 삶에 나타난 예고 없는 폭풍에 천둥이 일렀다. 찌르르 번개가 스치듯 선명한 노란 두 눈이 깜빡. 옐의 시선을 마주하고 한 번 더 깜빡.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옐에게 불공평한 싸움이다. 옐은 저보다 한참이나 작은 니키조차 이길 수 없는데, 제 삶에 무작정 들이닥친 폭풍을 이길 수는 더더욱 없었다. 여전히 니키는 언제 떠날 지 모르는 폭풍이고 옐의 삶을 온통 뒤흔들고 그렇지만 니키는. 폭풍같은 니키는.

 

 "나는 네가 필요해."

 

 니키는 옐을 사랑한다. 니키는 옐이 자신의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다. 옐은 아마도(아마도가 아니라 틀림이 없다니까! 우리 멍멍이는 나를 사랑한다고!) 니키를 사랑한다. 니키는 옐을 자신의 가족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순간을 공유하고 체온을 나누는 것을 넘어,

 그러니까 만일 니키의 영혼이 존재한다면, 니키의 집은... 

 

 

END